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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대한민국-245]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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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5-06-30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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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막걸리는 우리나라의 전통술로 오랫동안 이 나라 백성의 사랑을 받아온 역사를 갖고 있다. ‘마구 거른 술’이란 의미에서 막걸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는 설(說)이 정설처럼 알려져 있다.

곡식을 누룩으로 발효시켜 술을 만든 뒤, 위에 뜨는 맑은 부분을 먼저 떠내서 청주(淸酒)를 만들고, 나머지 찌꺼기가 많이 들어간 부분은 따로 걸러서 막걸리를 만드는데, 탁하다고 해서 탁주라고도 부른다.

막걸리는 일반 서민들의 술로 알려져 있는데, 맑은 부분만 떠낸 청주와 달리 색은 뿌옇고, 맛은 시고 털털했기 때문이었다. 막걸리는 농주(農酒)라고도 불리웠는데 농사를 지으면서, 집이나 들판에서 농사 일을 할 때 마시는 술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김홍도의 민화(民畵)에도 그렇게 그려졌고, 농촌의 풍속과 농사의 애환을 노래한 농가월령가에서 보여주듯, 농사일하는 사람들에게 막걸리는 없어서는 안되는 일반적인 술이었다.

그렇다고 농사꾼만 마시던 술은 아니었다. 고려 시대의 문인 이규보는 자기가 출세하기 전에는 막걸리를 마시다가, 출사하면서는 청주를 마셨는데, 벼슬에서 물러나면서는 또 막걸리를 마시게 됐다고 투정을 하기도 했다.

고려말 충신 이숭인이 정몽주에게 보낸 시에 “막걸리가 한 동이 가득 있습니다. 내일이 바로 중양절인데 함께 어디로 갈까요?” 하는 것이 있다. 정몽주와 이숭인, 정도전과 염흥방 등이 함께 모여 막걸리를 마시며 즐겁게 놀았다는 기록도 있다.

전라남도 강진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던 다산 정약용도 “막걸리를 마시게 되면서 소주를 멀리하게 되었네”라고 할 만큼 막걸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효종의 장인 장유와 실학자 이수광은 막걸리에 황태 안주를 곁들여 즐겁게 고담준론을 나누었다.

무너져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한말의 선비 최익현이나 매천 황현도 친구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마음을 달랬다.

이들뿐만 아니라 온 나라를 호령하던 연산군도 막걸리를 좋아해, 시를 남기기도 했으니 “막걸리야, 너를 누가 만들었더냐. 한잔으로 천 가지 근심을 잊어버리네”라는 구절을 남겼다. 어느 시인이 날씨가 추워지자, “날씨가 아무리 나를 춥게 해도, 나는 옷 사 입기보다는 한잔 술 막걸리를 사먹겠다”는 오기를 피우는 명대사도 남겼다. 막걸리는 그만큼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하는 술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풍경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집집마다 술 익는 냄새가 흘러나왔고, 술이 익을 때 단지 안에서 나는 소리로 술이 어느 만큼 익었는지를 가늠하기도 했다. 오가는 손님들이 막걸리 한잔을 나누어 마시면서 세상을 얘기하고 안면을 트기도 했다.

최근 K푸드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며 한국의 전통주, 막걸리를 찾는 사람이 세계 속에 많아졌다. 막걸리가 세계인의 술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될 날이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이다. 이제 막걸리는 한국인들만의 술이 아니다.

막걸리는 우리나라의 전통술로 오랫동안 이 나라 백성의 사랑을 받아온 역사를 갖고 있다. ‘마구 거른 술’이란 의미에서 막걸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는 설(說)이 정설처럼 알려져 있다.

곡식을 누룩으로 발효시켜 술을 만든 뒤, 위에 뜨는 맑은 부분을 먼저 떠내서 청주(淸酒)를 만들고, 나머지 찌꺼기가 많이 들어간 부분은 따로 걸러서 막걸리를 만드는데, 탁하다고 해서 탁주라고도 부른다.

막걸리는 일반 서민들의 술로 알려져 있는데, 맑은 부분만 떠낸 청주와 달리 색은 뿌옇고, 맛은 시고 털털했기 때문이었다. 막걸리는 농주(農酒)라고도 불리웠는데 농사를 지으면서, 집이나 들판에서 농사 일을 할 때 마시는 술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김홍도의 민화(民畵)에도 그렇게 그려졌고, 농촌의 풍속과 농사의 애환을 노래한 농가월령가에서 보여주듯, 농사일하는 사람들에게 막걸리는 없어서는 안되는 일반적인 술이었다.

그렇다고 농사꾼만 마시던 술은 아니었다. 고려 시대의 문인 이규보는 자기가 출세하기 전에는 막걸리를 마시다가, 출사하면서는 청주를 마셨는데, 벼슬에서 물러나면서는 또 막걸리를 마시게 됐다고 투정을 하기도 했다.

고려말 충신 이숭인이 정몽주에게 보낸 시에 “막걸리가 한 동이 가득 있습니다. 내일이 바로 중양절인데 함께 어디로 갈까요?” 하는 것이 있다. 정몽주와 이숭인, 정도전과 염흥방 등이 함께 모여 막걸리를 마시며 즐겁게 놀았다는 기록도 있다.

전라남도 강진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던 다산 정약용도 “막걸리를 마시게 되면서 소주를 멀리하게 되었네”라고 할 만큼 막걸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효종의 장인 장유와 실학자 이수광은 막걸리에 황태 안주를 곁들여 즐겁게 고담준론을 나누었다.

무너져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한말의 선비 최익현이나 매천 황현도 친구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마음을 달랬다. 이들뿐만 아니라 온 나라를 호령하던 연산군도 막걸리를 좋아해, 시를 남기기도 했으니 “막걸리야, 너를 누가 만들었더냐.

한잔으로 천 가지 근심을 잊어버리네”라는 구절을 남겼다. 어느 시인이 날씨가 추워지자, “날씨가 아무리 나를 춥게 해도, 나는 옷 사 입기보다는 한잔 술 막걸리를 사먹겠다”는 오기를 피우는 명대사도 남겼다. 막걸리는 그만큼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하는 술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풍경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집집마다 술 익는 냄새가 흘러나왔고, 술이 익을 때 단지 안에서 나는 소리로 술이 어느 만큼 익었는지를 가늠하기도 했다. 오가는 손님들이 막걸리 한잔을 나누어 마시면서 세상을 얘기하고 안면을 트기도 했다.

최근 K푸드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며 한국의 전통주, 막걸리를 찾는 사람이 세계 속에 많아졌다. 막걸리가 세계인의 술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될 날이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이다. 이제 막걸리는 한국인들만의 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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