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그리움의 이민사’ 대한의 꽃으로 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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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5-11-07 14:05본문
‘고독과 그리움의 이민사’ 대한의 꽃으로 피어나다
김순복 월드킴와 신임 회장 인터뷰
1970년 독일로 건너간, 파독 간호사 출신
“3년만 있다 오려던 독일, 그게 평생이 됐다”
- 황복희 기자
- 입력 2025.11.05 18:37
- 수정 2025.11.05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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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2년동안 월드킴와(세계국제결혼여성총연합회)를 이끌어갈 김순복 신임 회장을 인천에서 인터뷰했다. [황복희 기자] 그들이 매년 한차례 고국에서 만날때는 어김없이 새색시 모습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단풍잎 처럼 울긋불긋 곱디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모처럼 한끼 식사를 나누며 간간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그들만이 아는 눈빛과 표정으로 타국에서 쌓인 애환을 보따리채 풀고 간다.
올해도 어김없이 인천의 한 호텔 행사장을 빌려 전세계서 모여든 120명의 회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대한의 딸로서 공통분모를 나누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름하여 사단법인 세계국제결혼여성총연합회(월드킴와) 세계 대회다.
60~70년대 파독간호사 등이 주축이 되어 끌어온 이 단체가 내년이면 20주년을 맞이한다. 지난달 28일 인천에서 2025 세계대회를 가진데 이어 다음날 총회를 열고 신임 회장(제10대)을 새롭게 선임했다. 세계대회 참석겸 고국을 방문한 김순복 월드킴와 신임 회장(76)을 인터뷰했다. 그 또한 파독간호사 출신이다.
“저는 늘 생각해요. 우리가 해외에서 겪은 그 긴 세월의 눈물과 고생이 헛되지 않으려면, 이제는 서로 손을 잡고 다음 세대를 일으켜야 한다고요.”
독일 하노버에 거주하는 김순복 회장은 담담하지만 힘있는 어조로 말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여성으로서, 간호사로서, 또 독일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온 그는 “국제결혼 여성들의 이야기가 곧 한민족 이민사의 한 페이지”라고 했다.
3년만 있다 오려던 독일, 그게 평생이 됐다
1970년 5월, 당시 그는 스무살 꽃다운 나이의 간호사였다.
“독일이 어디 붙은 나라인지도 몰랐어요. 말도 음식도 모르고, 그저 3년만 일하고 돌아오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김 회장은 강원도 삼척 출신으로, 강릉간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정부 파견 간호사로 독일로 떠났다. 그때만 해도 독일은 낯설고 멀기만 한 땅이었다.
“당시 독일에서 받은 급여가 한국보다 여섯 배나 많았어요. 700마르크 벌면 100마르크만 쓰고, 나머지 600마르크는 한국으로 송금했어요. 그 돈이 한국의 외화 수입원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그 외화로 고속도로를 깔았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우리 세대 간호사들이야말로 대한민국 근대화의 숨은 주역이었다”고 했다.
“그 돈을 오빠 사업하라고 다 보냈는데 망했어요. 그런데도 후회는 안합니다. 내가 다시 살아냈으니까요. 간호사로서, 또 엄마로서, 여성으로서...”
김 회장은 1979년 독일 의사와 결혼해 현지에 정착했다.
“결혼 초기에는 문화 차이가 많았습니다. 언어도 서툴고, 독일인 시부모님과의 관계도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젊어서였는지, 버텼어요. 한국 여성들이 정말 강합니다.”
그는 “말이 안 통하면 몸으로 부딪히고, 배워가면서 견뎠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독일 사회에서 간호사, 어머니, 한인회장 등 여러 역할을 맡아왔다.
“하노버 한인회장을 다섯 번이나 했습니다. 강원도민회, 체육회, 독일지회장 등등. 봉사라면 뭐든 했어요. 우리 여성들이 없었다면 한인사회가 굴러가기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외로움은 늘 그림자처럼 따랐다. “외국에서 사는 건 매일이 고독”이라고 그는 말했다.
“언어가 늘 어색하고, 음식 하나도 낯섭니다. 남편이 독일 사람이면 내 아이들은 어디에 속한 걸까? 늘 그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았어요. 아이들이 ‘나는 한국 사람의 딸이다’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지난 10월28일 인천 골든튤립호텔에서 열린 2025 월드킴와 세계대회에 참석한 전세계 국제결혼 여성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황복희 기자] “월드킴와는 우리의 이름을 찾아주는 단체”
김 회장은 4년 전 처음 월드킴와(World-KIMWA) 활동에 참여했다. 우연히 행사에 참석했다가 감동을 받은 것이 계기다. “세계 각국에서 한국 여성이 국제결혼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데, 마치 내 인생을 보는 것 같았다. 봉사와 헌신, 그게 우리 삶의 공통분모였다”고 그는 회고했다.
월드킴와는 2006년 미국 시애틀에서 김예자(리아 암스트롱) 상임고문이 창립한 단체로, 현재 16개국 40여 지부에서 5000여 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다. 그는 “이 단체는 외로웠던 여성들의 마음을 연결해주는 끈”이라고 했다.
“우리의 존재는 ‘이방인’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세계 어디서든 한국의 얼굴로 살고 있어요. 월드킴와는 그런 자부심을 공유하는 가족 같은 곳입니다.”
김 회장은 내년 창립 20주년을 앞둔 월드킴와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첫째는 소통”이라며 “회원들끼리 마음이 통해야 단체가 커진다”고 그는 말했다. 둘째는 화합..지역이나 세대 차이 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것. 마지막은 차세대로, “그들이 이어받지 않으면 우리 역사가 끊긴다”는게 김 회장의 생각이다.
그는 독일 한인사회에서도 세대교체의 어려움을 실감하고 있다.
“지금 한인회장들은 거의 80대에요. 게다가 우리 2세들은 봉사보다는 자기 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도 사회적 기반을 쌓는 시기니까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공동체’의 의미를 알려줘야 합니다.”
현재 월드킴와 독일지부는 차세대 회원 초청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차세대 참여를 높이기 위해 지난해 총회 때도 젊은 세대의 참가비를 일부 지원했다. 그런데도 한두 명밖에 안왔다고 했다. 그는 “아직 우리 단체를 모르기 때문”이라며 “그래서 제 아들, 딸 세대부터 끌어들이려 한다. ‘우리 어머니 세대의 뿌리를 알아야 너희도 정체성을 찾는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은 월드킴와의 새로운 과제로 ‘한국 내 다문화 여성과의 연대’를 꼽았다. 현재 한국에도 외국인 배우자와 결혼한 여성들이 많다. “언어와 문화 장벽을 넘어가며 가정을 꾸리고 있는 그들을 월드킴와의 가족으로 품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20주년 기념행사를 어디서 개최할지는 아직 미정이다. “세계 각국에서 회원들이 와서, 우리의 뿌리인 한국과 미래 세대의 다리를 놓는 행사를 만들려고 한다”고 그는 밝혔다.
김 회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걸어온 길이 참 길었어요. 독일에서 눈 내리는 밤, 병원에서 환자 돌보며 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그 고생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으니까요.”
그는 월드킴와의 존재 이유를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는 이민 여성의 역사이자, 한국 여성의 자부심입니다. 이 세상 어디서든 ‘나는 대한의 딸’이라는 마음으로 살았어요. 이제 그 이야기를 세상에 남길 겁니다. 월드킴와는 바로 그 기록의 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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