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바다 위에서 숭고한 ‘사랑’ 실천한 권영호 회장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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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6-02-19 09:06본문
거친 바다 위에서 숭고한 ‘사랑’ 실천한 권영호 회장 (下)
파도와 함께 한 60년 특별 인터뷰
원양어업은 외교이자 수교의 길...안익태 선생 유택 기증
나눔을 ‘시스템’으로 만든 휴머니스트
- 김희정 재외 기자
- 입력 2026.02.17 19:23
- 수정 2026.02.18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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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호 전 인터불고그룹 회장은 폐선 한 척을 밑천 삼아 굴지의 원양업체를 키운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다. 매일신문 DB1966년 26세의 나이에 최연소 기관장으로 원양어업에 첫발을 내디딘 후 1972년에는 스페인 라스팔마스 기지 주재원으로 현장을 누비면서 바다에서 60년의 세월을 버텨낸 권영호 인터불고 회장. 누구에게나 ‘60년’은 이렇듯 특별한 숫자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회사보다 국가, 돈보다 신용, 이익보다 사람”을 먼저 우선시 했던 그의 항해는 대서양을 넘어 지중해와 아프리카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한국 원양어업의 뼈대를 지탱한 ‘기술과 신뢰’의 핵심을 만들었다.
본지는 최근 스페인에서 권영호 회장과 심층 인터뷰를 통해 그의 성공담보다 그 이면에 가려진 ‘휴머니스트’로서의 인간적인 고뇌의 모습과 대한민국과 스페인에서 ‘원양어업 발전’에 기여한 그의 숨은 공로를 취재, 3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권영호 회장은 자신을 “대서양·지중해를 개척하고 정복한 수산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정복’은 승리의 언어가 아니라 책임의 언어였다. 그는 원양어업을 통해 바다 인접 국가들과의 교류를 넓혔고, 때로는 수교의 현장에서 명예영사로 역할을 맡았으며, 벌어들인 외화를 국내 개발에 연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는 “돈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일”을 선택했다. 권 회장은 원양어업을 ‘국가 외화 산업’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바다가 ‘외교의 통로’라고 말했다.
“수산인들을 통하여 바다 인접 국가들과 수교하는 데, 수산인의 공이 적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예로 “앙골라 수교 후 공이 인정되어, 정식 공관이 들어오기 수년 동안 앙골라 공화국 대표 자격으로 명예영사직을 수행했다”고 말했다. 원양어업의 현장은 늘 협상과 계약의 연속이다. 입어 협정, 항만 이용, 수리 인프라, 물류, 현지 고용 등의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공식 외교가 닿지 않는 곳에서 관계를 만들고 유지해야 한다. 그 접점에서 권 회장이 ‘민간 외교’의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지중해 개척, 그리고 올림픽의 뒤편
권 회장은 1980년대 중반의 기억을 또렷하게 꺼냈다. 영국 런던에 외환은행 지점이 있던 시기, 지점 직원 2명이 스페인 마드리드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그 목적은 “매년 회사가 벌어들이는 수천만 달러 어획고를 런던 지점을 통해 본국에 송금해 1988 올림픽을 앞둔 한강 정비 사업에 투자하는 데 있었다”고 말했다.
권회장은 국가발전에 기여하고자 많은 외화를 송금하였고, 원양어업이 벌어들인 외화가 어떻게 국내로 들어가 기반시설과 국가 프로젝트에 연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반 개인들은 알수 없는 것이었는데, 권 회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외화 송금이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 그 흐름을 알 수 있었다.
권 회장은 1990년 5월, 대서양을 넘어 지중해로 진출했다. 수개월 협상을 거쳐 지중해 어업 협정을 체결했고, 선박 2척을 입어했다. 이후 1992년 12월 17일에는 알바니아 국영 URT 전자회사를 최초로 인수한 기업으로서 한국 기업의 알바니아 진출 사례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어장에서 1987년 해상회의를 하기 위해 주변으로 모여든 인터불고 선박들.그런데 이 지중해 이야기는 뜻밖에도 ‘올림픽’으로 이어졌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권 회장은 마드리드 자택에 한국 마라토너 황영조 선수를 비롯한 선수단 7명이 20여 일 전지훈련을 할 수 있도록 숙소는 물론 모든 비용을 제공했고, 지중해에서 포획한 참다랑어를 대량 공급해 식탁 메뉴로 제공했다.
“참다랑어는 고단백이고 지구력에 매우 좋습니다. 당시엔 선주도 쉽게 못 먹던 아주 비싼 식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의 승리를 위해 아낌없이 비싼 참다랑어를 매일 선수들에게 제공했다.
결과적으로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환경에서 전지훈련을 할 수 있었던 황영조 선수는 금메달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가 말한 참다랑어의 “과학적인 증거”의 진위는 차치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이 있다. 해외에서 구축한 네트워크와 자원이 국가의 스포츠 현장, 국민의 자긍심과 연결되는 순간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이름으로 기억을 지키는 일”
권 회장은 1990년 11월, 애국가 작곡가 고(故) 안익태 선생이 가족과 살던 스페인, 팔마 데 마요르카의 집이 매각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매입한 후 수리까지 하여, 1993년 8월 17일 대한민국 정부에 기증했다. 이후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조업하는 선박들이 하역을 위해 항구로 입항하여 이동하는 장면(대성 21호/3천톤급)이 대목은 ‘기업가의 기부’로만 읽히기 쉽다. 그러나 필자가 현장에서 본 권 회장의 태도는 달랐다. 그는 그것을 ‘선행’이 아니라 “해외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지키는 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국경 밖에서 국가의 상징을 지키고, 다음 세대가 기억할 수 있도록 남기는 일을 권회장은 ‘공동체’의 연장선에서 묵묵히 실천을 해 왔던 것이다.
권 회장은 2010년 EU IUU 발효 이후 아프리카 연안 조업지를 잃었고, 많은 수산회사들이 도산·이동했으며, 본인 회사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바다의 질서가 바뀌는 순간, 한 세대의 산업도 접히게 되었다. 그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권 회장은 그 질문에 “교육과 의료, 그리고 장학”으로 답을 했고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가치관을 지속적으로 실천해 왔다. 권회장은 어느정도 성공을 하자 조국을 찾아 고향을 방문했다.
“내 고향은 내가 어린시절 집을 떠나올 당시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곰곰이 생각을 했고, 인간의 풍요는 배움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으로 1986년 내 고향 울진에 장학재단을 설립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중국 길림성 소재 길림대학생들의 장학금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설립한 식품공장 준공식 장면.그는 장학재단의 목적을 우수한 인재를 발굴한다든가 큰 나무를 심겠다는 목적보다는, 여러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숲을 이룰 수 있도록 보편적인 평준화를 지향했다. 다같이 배우고 잘사는 고향을 만들기 위하여 중고등학생들 위주로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는데 중,고등학교도 의무교육제가 되면서 지금은 대학생으로 어어졌다. 이러한 초석이 2026년에 40주년을 맞게 되었다.
그동안 장학금을 받은 수혜자는 울진 고향을 비롯하여, 주변 지역과 유학생, 중국 아프리카 등으로도 넓혀졌고 약 19,600여명에 달하는 학생들에게 180억원 정도의 장학금이 주어졌다.
“원양어업의 바다는 거짓이 없습니다. 저는 바다에서 땀흘려 모은 재물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돕고 살았지만, 고마움은 언제나 말이 없는 자연의 바다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며 무한한 감사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돈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일”
“학교를 세운 것은 조선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지구상 인류를 위해서였습니다. 처음엔 병원을 만들었고, 그 다음에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학교를 세웠지만 경제적 여건이 안 되는 학생들이 많아, 전액 장학금을 주기 위해 식품 공장을 만들어 수익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돌렸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큰돈’이 아니다. 장학금이 끊기지 않도록 ‘공장’을 세워 수익을 장학으로 돌리는 구조—즉 ,나눔의 시스템화다. 그는 단발성 기부가 아니라 “계속 돌아가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진정한 휴머니스트’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기회의 구조를 설계한 사람에 가깝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때 한국마라톤 선수들과 함께 폐막후 공항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장면.(왼쪽 부터 김재룡, 권 회장, 황영조, 김완기 선수)권 회장을 만난 뒤, 기자는 ‘성공한 한상’이라는 문장만으로는 그가 살아온 삶의 무게를 다 담을 수 없다고 느꼈다. 그의 삶에는 성취의 빛만큼이나, 사람과 조국에 대한 책임의 그림자가 깊었다. 그 그림자는 때로는 눈물이었고, 때로는 침묵이었다.
그는 바다에서 번 돈을 자신을 위해 축적하는 대신, 사람과 공동체를 위해 흘려보내는 것을 선택했다. 원양어업의 현장에서 선원을 살리고, 정비 기술로 산업의 시간을 지키고, 외교의 접점에서 관계를 만들고, 교육으로 세대를 살리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 원양어업 70주년을 앞두고 그것을 기념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외화 액수’만 적는 것이 아니라, 그 외화를 만들어내고 현장에서 사람을 살린 이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다. 권영호.그 이름은 바다에서 신용을 지켰고, 국경 밖에서 한국인의 신뢰를 지켰으며, 마지막에는 ‘나눔’으로 인간의 품격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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