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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필영 제15대 회장, “통일운동도 미주총연이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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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6-09-02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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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와 통일문제 고민한 4.19세대

이민휘 회장 측의 ‘용공시비’에 시달려

(필라델피아=월드코리안신문) 이종환 기자   

“신필영 제15대 총회장은 총연 역사상 선거 후유증을 가장 심하게 앓고 탄생한 회장이다. 재임 기간 중 협회 운영을 조직적이고 활동성 있게 이끌어 많은 가시적 사업효과를 보여준 만큼 용공시비 등 각종 구설수에도 오르내렸다.”

이오영 제19대 총회장 재임 시 제작된 <미주총연 25년사>는 이런 글로 신필영 회장 시기를 시작했다.

신필영 회장을 만난 것은 8월 30일이었다. 무려 50년을 워싱턴 DC 지역에서 거주하며 사업에도 성공하고, 워싱턴지구한인회장도 지낸 신 회장은 5년 전부터 아들과 딸이 살고 있는 필라델피아로 와서 부인과 함께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신필영 회장시기 발행한 총회 보고서신필영 회장시기 발행한 총회 보고서

“올해 91살입니다. 골프장과 교회, 식품점에 가는 길만 알고 있어요.”

신 회장은 교회의 지인과 함께 부부 동반으로 매일 골프를 치면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 나이에 ‘굿샷’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다.

신 회장을 만났을 때는 부인도 함께했다. 먼저 아들이 소개했다는 중국집에서 식사를 하고, 이어 자택으로 가서 얘기가 이어졌다.

그는 “워싱턴에서는 3에이커의 저택에 잔디 깎는 비용만 1년에 3만 불씩 지출했는데, 이곳에 오니 집도 작아서 청소하기가 너무 편하다”고 말했다.

기자는 신 회장을 미주총연 행사에서 여러 번 만났다. 당시 기사에도 그의 축사나 격려사 발언들이 소개돼 있다.

2015년 7월 김재권 제26대 회장이 LA에서 취임했을 때 신필영 회장은 “미주총연이 이 법정 저 법정을 오가는 사태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캐사르의 말을 인용해 “주사위는 던져졌다. 발전을 위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그해 임원 이사회 회의에서는 격려사를 하면서 “미주한인사회의 정체성은 독립, 민주화, 통일 지향”이라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 때부터 내려온 한인회 전통을 잘 살려나가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신 회장은 1956년 고려대에 입학한 4.19세다. 당시 의식 있는 청년들이 모여들었던 명동의 ‘학사주점’ 멤버로, 민주화와 통일문제를 고민했다. 이 경험이 평생의 정체성을 이룬 셈이다.

하퍼포드에 있는 신 회장의 자택에는 <60년대 학사주점 이야기>라는 책이 있었다. 2011년 나남출판사에서 ‘4.19세대의 시대증언’이라는 부제를 붙여 출간한 책이다.

“책을 많이 버렸는데, 아직 남아있네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골라가세요. 많이 가져가면 더 좋고…”

이같은 회장의 제안에 책장을 둘러보다 만난 책이었다. 이 책에는 1961년 남포집에서 출발해 학사주점으로 이어진 8년여의 얘기가 적혀 있었다.

학사주점은 당시 젊은 청년들은 물론 중견 문인과 학자 등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의 집거지였다. 신 회장도 초기부터 이 주점의 멤버로 참여했다. 신 회장의 이름도 책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미주총연 25년사

“이문규와 김병영도 아시겠네요? 제 처고모부와 처고모인데요.”

이렇게 묻자, 신 회장의 부인이 “은경이 엄마, 아빠잖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 회장의 큰딸 이름을 지어준 것도 이문규였다고 했다. 책에는 당시 학사주점의 에피소드들이 많이 소개돼 있었다.

“1968년 7월 말과 8월 초, 사회 일각에 거센 돌풍이 밀어닥칠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을 때엔 이미 사단이 일어난 후였다. 이른 새벽 중정 요원들이 60년대 학사회와 학사주점에 관련된 친구들 집을 예고 없이 방문, ‘남산’으로 연행해갔다는 소식이 속속 전해졌다.”

이어 “며칠이 지나자 윤곽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며 이렇게 서술했다.

2015년 LA에서 열린 미주총연 정기총회지난 2015년 LA에서 열린 미주총연 정기총회

“중앙정보부(부장 김형욱)가 학사주점과 60년대 학사회, 월간지 ‘청맥’, 그리고 몇 개의 연구 및 종교 서클 등을 한 얼개로 묶어 북쪽과 연계시킴으로써 반체제 뿌리를 뽑아버리겠다는 것이었다.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이 월간 ‘청맥’의 창간 발행인 김종태, 주간 김질락, 편집장 이문규 등이었다. 이들이 자진 월북해 북쪽과 접선하고 공작금을 받아, 북의 밀명으로 합법 정당을 만들어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것이다.”

신필영 회장도 당시 중정에 끌려갔다. 하지만 중정 직원이었던 학교 제자 덕분에 큰 고초는 면했다고 한다.

신 회장은 1972년 미국으로 건너와 비즈니스에서도 큰 성공을 했다. 아메리카 드림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나라와 민족 문제에 대한 관심은 잃지 않았다.

미주총연 총회장이 되어서는, 미주한인사회가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고, 북경에서 세계한민족회의를 개최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25년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해외동포 조국통일 북경회의를 추진키 위하여 북경을 답사하고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에게 보낸 서신 등의 일로 용공시비가 비등해졌다. 당시 일부 세력에서는 이 사태를 ‘미주판 신공안정국’으로 표현하며 여론을 유도했다.”

이어 ‘25년사’는 덧붙였다. “재임 초기에 ‘한국 정치에는 눈을 돌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헌신과 봉사 차원에의 협회 사업에 주력하였던 신 총회장은 임기 시작부터 겪은 시련을 임기 만기 때까지 겪는 수난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제16대 회장단이 이민휘 총회장을 비롯, ‘5인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미주총연에서 신필영 총회장은 이민휘 전 총회장과 대척점에 있었다. 이민휘 회장은 신 회장 시기는 물론, 이후에도 긴 시기 미주총연 회장 선거에 간여하며, 불미한 흔적을 남겼다. 안타까운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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