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윤 칼럼] 오아시스 전략: 동남아시아에서 오래 머무는 자의 현지화 철학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5-11-05 11:05본문
2002년 8월 하늘에서 본 캄보디아는 어둠이 짙어 있었다. 공항에 내렸을 때 열기는 호흡을 곤란하게 할 정도로 내 마음을 짓눌렀다. 여기서 23년의 시간을 보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전략은 어쩌면 큰 기업에는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개인 사업체를 운영하거나 선교사들에게 적당한 논리일지도 모른다.
동남아시아의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고민할 때, 필자는 이 땅을 사막에 비유하곤 한다. 그늘은 귀하고, 열매는 더디게 맺히며, 외부의 도움이나 내부 자원만으로는 오래 버티기 힘든 환경이다. 법과 제도가 아직은 미약하고, 시장의 예측 가능성은 낮은 이곳에서 필자는 가장 확실한 생존 방식, 바로 ‘오아시스 전략’을 발견했다.
오아시스 전략은 단순히 땅을 점유하려는 공간 중심의 전략이 아니다. 땅이 아닌 시간을 누적시키고, 구조가 아닌 관계를 세우는 시간 중심의 철학이다. 한마디로, “떠날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함께할 사람”이라는 다짐에서 시작되는 전략이다.
이 철학은 사역뿐 아니라 비즈니스에서도 정확히 통한다. 캄보디아 시장은 단기적인 속도나 효율만으로는 결코 뚫을 수 없다. 처음에는 누구나 빠른 성과를 원하지만, 이곳의 시장은 서두르지 않는다. 모든 협력, 계약, 심지어 제도의 작동까지도 ‘신뢰의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관계가 없으면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지 사업은 자리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쌓는 일이다. 사업가에게 오아시스 전략은 이렇게 말한다.
“빨리 가려 하지 말고, 오래 버텨라.” 오래 머무르는 자만이 시장을 깊이 이해하고, 현지인의 신뢰를 얻으며, 비로소 진정한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 캄보디아에서 가장 귀한 자산은 투자 자본이 아니라 관계 자본이다. 이 신뢰는 투자보다 느리게 쌓이지만, 한번 형성되면 어떤 외부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강력한 생명력을 가진다.
캄보디아 금융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히는 ACLEDA Bank는 ‘관계 자본’이 어떻게 지속 가능한 성장의 기반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1993년 마이크로크레딧 NGO로 출발한 ACLEDA는 초기에 정부와 국제개발기구의 지원을 받으며 지방 단위의 소규모 대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은행 인프라가 거의 없던 시절, 이들은 수백 명의 신용 담당자(credit officer)를 지역 곳곳에 파견해 농민과 소상공인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사정을 듣고, 신용을 함께 만들어 갔다. 이 반복적인 대면 접촉이 바로 ‘작은 신뢰’의 씨앗이 되었고, 시간이 흐르며 지역 전체로 퍼진 신뢰의 네트워크가 ACLEDA의 가장 강력한 자산으로 성장했다.
이후 ACLEDA는 상업은행으로 전환하면서 축적된 신뢰를 금융 자본으로 바꾸었다. 고객은 은행의 지점망을 통해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고, 직원은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고객의 삶을 이해했다. 이렇게 형성된 관계의 연속성은 곧 시장점유율과 브랜드 신뢰도로 이어졌다.
캄보디아에서 수년을 살아도, 우리는 이 나라의 문화적 뿌리,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감정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 방식’을 답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현지인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존중’일 때가 많고, 느린 결정은 게으름이 아니라 ‘신중함’의 표현일 때가 많다.
우리는 이것을 비효율로만 해석하지만, 그 오해가 반복될수록 진짜 신뢰의 문은 닫힌다. 진정한 현지화는 기술이나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이해하는 일, 문화의 맥락을 배우는 일, 그리고 ‘이 나라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익히는 일이다. 이 과정을 건너뛰면, 어떤 전략도 결국 표면만 스쳐 지나간다.
많은 외국 기업이 화려한 건물을 짓고도 이 땅에서 사라진 이유는 단 하나이다. ‘머무를 이유’, 즉 관계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작은 규모라도 꾸준히 머무르며 현지 시장의 일부가 된 사람들은 그 존재 자체가 브랜드가 되고, 신뢰가 네트워크를 확장한다.
오래 머무는 자의 전략은 느리지만 강하며, 이는 단순한 ‘적응’을 넘어 ‘동화’의 수준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현지의 언어를 배우고, 문화의 리듬에 익숙해지며, 그들과 같은 속도로 호흡하는 것. 이 과정에서 기업은 단순한 외국 자본이 아닌, 지역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 존중받으며 자리 잡게 된다.
필자소개(김대윤)
캄보디아 화장품협회(CCA) 고문
캄보디아에서 왕립법률경제대학교 대학원(사법 전공) 졸업

- 이전글베트남 여성 공무원, 충남 아산시 여성커뮤니티센터 ‘나온(ON)’ 방문 25.11.05
- 다음글킨텍스, 2025 K-뷰티엑스포 베트남서 630건 수출 상담 25.11.0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