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범죄 단지' 안과 밖이 전혀 다른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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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회 작성일 25-10-27 13:11본문

(프놈펜=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14일(현지시간) 오후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인근 도로에서 차들이 달리고 있다. 2025.10.14 son@yna.co.kr
(자카르타=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허겁지겁 준비했다. 지난 13일 오후 출장 지시를 받자마자 캄보디아행 항공권부터 예매하고는 닷새 치 옷가지와 노트북을 급히 가방에 구겨 넣었다.
캄보디아 범죄 단지에서 고문당한 후 살해된 한국인 대학생 사건이 뒤늦게 알려졌고, 이달 들어 관련 보도가 급증하자 "어쩌면 출장을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에서 스치기는 했다.
그렇다고 확정되지 않은 출장을 미리 준비할 수는 없었다. 잠시 생각했더라도 막상 떠나려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을 거쳐 다음 날 아침에 도착한 캄보디아 테초 국제공항 입국장에는 약속대로 현지인 택시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집에서 출발하기 전 연락을 주고받은 오창수 시아누크빌 한인회장이 공항으로 보내주겠다고 한 택시 기사였다.
분명 한국어를 잘한다고 했는데 만나보니 전혀 아니었다. 다른 택시 기사였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현지인 택시 기사는 한국어는커녕 영어조차 한마디도 못 했다. 의사소통될 리가 없었다.

(프놈펜=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14일(현지시간) 오후 캄보디아 테초 국제공항 인근 주유소에서 직원이 차량에 기름을 넣고 있다. 2025.10.14 son@yna.co.kr
그는 공항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아무런 말도 없이 다짜고짜 휴대전화를 치켜들었고, 둘의 얼굴을 함께 담은 '셀카'를 찍었다. 사진은 곧 누군가에게 전송된 듯했다.
그 순간 미리 인터넷에서 검색한 범죄 단지 '감금 경력자'의 생생한 후기가 영화 자막처럼 눈앞에서 재생됐다.
"공항에서 누군가가 데리러 나와 '인증 사진'을 같이 찍고 관리자에게 보냅니다. '물건'이 도착했다는 의미 같았어요. 검은색 승합차에 올라타면 범죄 단지인 '웬치'로 끌려가 감금됩니다."
설마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빨리 범죄 단지가 몰려 있는 시아누크빌로 가서 취재부터 해야 했다. "진짜 범죄 단지로 끌려가면 오히려 르포 기사는 걱정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택시 뒷좌석에 올라탔다.
말이 좋아 택시지 그냥 낡은 경차였다. 동남아시아에서 흔한 '그랩'(Grab) 간판도 없이 그냥 무허가로 택시 영업을 하는 듯했다. 택시 기사 오른팔에 그려진 문신이 뒷좌석에서 보여 더 불안했다.
범죄 단지 조직원처럼 보인 젊은 택시 기사와 범죄 단지에 끌려갈까 봐 걱정한 기자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3시간 동안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시아누크빌[캄보디아]=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14일(현지시간) 오후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상가 건물에 현지어와 함께 중국어 간판이 붙어 있다. 2025.10.14 son@yna.co.kr
목적지인 시아누크빌에 도착해 오 회장을 만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의심한 현지인 택시 기사에게 미안했다. 약속한 요금보다 조금 더 줬다.
오 회장 차로 갈아타고 '카지노의 도시'로 불리는 시아누크빌 시내부터 돌아봤다. 그는 최근 3년 동안 시아누크빌 범죄 단지에 감금된 한국인을 200명 넘게 구조한 선교사였다.
시내 곳곳에 있는 대형 호텔과 음식점 간판에 중국어가 즐비했다. 여기가 캄보디아인지 중국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6∼7년 전부터 갑자기 중국인 부호들이 시아누크빌로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캄보디아 시민권을 산 중국인들이 땅을 직접 사거나 빌려서 호텔과 음식점을 크게 합니다."
오 회장의 왼손은 운전대를 잡고 있었지만, 오른손은 바쁘게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스치는 곳마다 전부 웬치라고 했다.
밖에서 보면 한국 아파트나 리조트와 비슷했다. 그러나 대부분 주변에는 교도소 담장처럼 3∼4m 높이의 돌담이 서 있었다. 폐쇄회로(CC)TV가 설치된 돌담 위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고 깨진 유리 조각도 박혀 있었다.
입구에는 현지인 보안 요원 6∼7명이 차를 검문하며 웬치를 지켰다. 오 회장은 시아누크빌 전체가 '감옥 도시'와 같다고 말했다.
시아누크빌에서 수도 프놈펜으로 다시 넘어와 내부를 취재한 '태자(太子) 단지'는 작은 왕국처럼 느껴질 정도로 거대했다. 지금은 현지 경찰 단속으로 텅 비었지만, 한때 수천 명이 머물면서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을 하던 수도권 최대 범죄단지였다.

(시아누크빌[캄보디아]=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14일(현지시간) 오후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 있는 범죄 단지 입구에서 보안 요원들이 지키고 있다. 2025.10.14 son@yna.co.kr
다른 한국 방송사와 신문사 기자들도 캄보디아로 몰려왔다. 현지 기자보다 한국 취재진이 더 많은 느낌이었다.
정부도 김진아 외교부 2차관과 박성주 국가수사본부장을 포함한 합동 대응팀을 캄보디아에 파견했다.
캄보디아 당국과 논의한 정부 대응팀은 범죄 단지에서 현지 경찰에 체포되거나 구출된 한국인 64명을 한꺼번에 송환했다.
또 한인 사건을 전담해 처리하는 경찰관인 '코리안 데스크'는 캄보디아에 두지 못했지만, 양국은 테스크포스(TF)를 꾸려 최근 잇따른 납치와 감금 사건에 함께 대응하기로 했다.
많은 한국 기자가 몰려 취재 경쟁이 벌어진 데다 정부 대응팀까지 캄보디아에 머물면서 자연스럽게 출장도 길어졌다. 옷가지를 챙길 때는 닷새 안팎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 취재가 열흘 넘게 이어졌다.
캄보디아에서 취재하는 동안 한국과 자카르타에 있는 가족뿐만 아니라 회사 선후배와 지인들 연락도 많이 받았다. 다들 "르포 기사를 봤다"며 "거기 괜찮냐"고 물었다.
외교부가 캄보디아 일부 지역에 여행 금지령을 내리고, 범죄 단지와 관련한 '살벌한' 뉴스도 매일 쏟아지면서 지금 한국에 비치는 캄보디아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범죄 국가'인 듯했다.

(프놈펜=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15일(현지시간) 오후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인근 테초 국제공항에서 정부 합동대응팀 단장인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이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25.10.16 son@yna.co.kr
그러나 실제로 직접 본 캄보디아는 평온했다. 편견을 갖고 도착한 첫날을 빼고는 취재하러 시내를 돌아다닐 때도 치안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현지인 가이드뿐만 아니라 호텔 직원이나 슈퍼마켓 종업원도 웃으며 맞아줬다.
주캄보디아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지금까지 한국인 관광객이 범죄 단지에 납치되거나 감금된 사례는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범죄 단지 안에서 벌어지는 감금과 고문이다. 주로 중국 범죄 조직과 연계된 것으로 의심되는 중국인 총책이 중국 동포(조선족)나 한국인을 중간책으로 두고 범죄 단지를 운영한다.
직접 본 캄보디아 범죄 단지의 안과 밖은 너무나 달랐다.
싱크탱크 미국평화연구소(USIP)는 캄보디아의 사기 산업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에 달하는 125억달러(약 17조7천억 원)를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사실상 사기 산업이 국가 경제를 떠받치는 상황이다.
한국과 캄보디아 정부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수사 공조를 강화한다고 밝혔지만, 실제 제대로 될지는 의문이다.
캄보디아 경찰은 범죄 단지로부터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고 수시로 단속 정보를 흘리기 때문이다. 지금은 국경 넘어 라오스나 베트남 등지로 달아난 대규모 범죄 단지 조직원들이 언제 또다시 캄보디아로 넘어올지 모른다.

(시아누크빌[캄보디아]=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14일(현지시간) 오후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 있는 범죄 단지 인근에 3m가 넘는 담벼락이 서 있다. 2025.10.14 son@yna.co.kr
옥해실 재캄보디아 한인회 부회장은 "태자 단지와 함께 3대 범죄 단지로 꼽히던 망고 단지와 원구 단지도 단속할 때는 범죄자들이 다 빠졌다가 다시 와서 범행하는 식으로 계속 운영됐다"고 말했다.
이번에 송환된 한국인 64명을 바라보는 시각은 국내에서 비판적이다.
그러나 취업 사기를 당했든, 큰돈을 벌려고 스스로 범죄 단지에 찾아갔든 당연하게 감금과 고문을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면 국내로 송환해서 처벌하면 된다.
지난 8월 캄보디아 범죄 단지에서 고문당하다가 피살된 한국인 대학생의 시신이 지난 20일 현지 불교 사원에서 부검 후 화장됐다. 사망한 지 2개월여 만이다.
시신이 사원 내 화장시설에 들어간 지 5분 만에 굴뚝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학교 선배의 말에 속아 먼 이국땅에서 한 줌의 재가 돼 고국으로 돌아간 이름 모를 대학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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