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나는 바다에서 태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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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회 작성일 25-06-16 10:54본문
[현장]"나는 바다에서 태국으로 향했다”
김장열 전 태국한인회장, 바다와 함께 한 38년 인생 역정 고백
쓰나미 위기 속에 빛난 한인회의 위상, 감동을 주는 공동체의 중심이 되다
바다에서 배운 신뢰, 육지에서 꽃 피우다
최근 한인자문회의 재결성, 한인회 지원하고 견제하는 역할 맡을 터
- 박정연 재외기자
- 입력 2025.06.15 12:01
- 수정 2025.06.15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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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용선사업을 비롯해 물류, 에너지, 보동산 등에 걸쳐 다각도로 사업을 일군 김장열 전 한인회장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인터뷰했다. [황복희 기자]](https://cdn.dongponews.net/news/photo/202506/53025_205292_4557.jpg)
1987년 8월, 30대 초반의 항해사 김장열은 인천항을 떠나 태국으로 향했다. 당시 그는 태국이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의 일이다. 1957년생인 김장열 전 태국한인회장은 그 시간을 "2세대쯤 된다”고 표현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강제 징용돼 콰이강의 다리 수용소 소장과 군속 등으로 일했던 이들이 1세대라면, 그는 그다음 세대인 셈이다. 그의 인생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태국 속 한인 사회의 축소판이자 살아있는 역사다.
해양에서 배운 신뢰, 육지에서 꽃 피우다
용선업계의 선구자이자 현재 씨그린 회장인 김장열은 부산해양대학교 항해과를 졸업한 뒤 최초 초대형 유조선(VLCC) 항해사로서 바다를 누볐다.
"항해사로 3년간 일하고, 국내 최대 용선회사에 입사했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KOCHART-한국유니버살해운 용선 업무 팀장으로 일하며 세계 해운 시장을 몸으로 익혔다. 세계 네트워크, 신용, 계약 구조... 모든 걸 직접 배웠다"
그는 이때 쌓은 경험이 낯선 태국이라는 나라에서 열매를 맺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시암이라는 태국 시멘트 회사와 일을 하게 됐다. 태국 국왕이 만든 가장 큰 회사였다. 그런데 용선에 대해 전혀 모르더라. 이 나라엔 용선 전문가가 없었다.”
참고로 용선 사업은 선박을 빌려주는 선주와 빌리는 용선자 간의 계약을 통해 화물 운송을 하는 해운업의 한 형태다. 선박의 종류, 항해 기간, 운임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용선 계약이 이루어진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그 틈을 파고들기로 결심했다. "인터뷰를 거쳐 회사를 설득했고, 태국으로 진출하게 됐다. 농수산물 수출,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물류 전문가가 없다는 건 큰 기회였다.” 그의 용선 사업은 사실상 태국에서 처음이었다. 그는 혼자서 해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1989년 씨그린운송을 설립했다. 이는 태국에서 한국인이 설립한 최초의 벌크 화물 운송 전문 용선 해운사다. 특히 태국 쌀을 10년간 유럽으로 운송하기 위한 태국 최초 선하증권 발행을 이끌어내며 태국 해운업에 큰 획을 그었다. 또한, 2001년 씨그린 해운을 설립하여 태국 모든 항구에 기항하는 벌크 화물선의 선박 대리점 사업을 시작했으며, 바지선으로 소량 화물 운송 사업을 선도했다.
"IMF가 터지기 전까지 10년 동안, 용선을 거의 혼자 했다. 너무 바빠서 화장실도 못 갈 정도였다.”
그의 사업 영역은 해운업에만 그치지 않았다. 1998년 에버 쉬플렌디드를 설립하여 태국 치앙마이 소재 벌꿀 농장에서 채취한 생 로열젤리를 냉동 건조 공법으로 캡슐 생산, 태국 및 해외 수출에 나섰다. 2005년에는 한국의 STX해운과 합작해 우니그린 에이전시를 설립(지분 30%), 한국~중국~홍콩~태국 경유 컨테이너 화물 운송 선사로 사업을 확장했다. 2009년에는 SK그룹 생산 윤활유 한국 내 총판매법인 한유에너지와 합작(지분 51% 확보)해 한유에너지 태국 판매법인을 설립, 태국 선사 선박에 해상 윤활유를 공급 판매했다. 가장 최근인 2017년에는 J&J에셋을 설립해 태국 부동산 및 금융 자산 투자 및 관리 업체로서 호스텔과 부티크 호텔, 금융 상품, 보험 투자를 운영하며 사업 다각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1년 장보고 한상 수상자로 선정이 되어 해양수산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쓰나미 구호활동, 태국-한국 민간 우호의 물꼬를 트다
성공적인 사업가였던 그는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하게 되는데, 바로 ‘한인회장' 자리였다. 방콕국제학교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업 문제가 생기자, 전임 한인회장이 모든 책임을 지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혼란에 빠진 한인회는 새로운 한인회장을 재선출하려 했고, 당시 교민 사회에서는 ‘이상한 사람들이 한인회장 자리에 나선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 회장은 이러한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어 태국 제24대 한인회장(2005~06년)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여 후인 2004년 12월 26일, 태국 남부에 쓰나미가 덮쳤다. 태국이 큰 곤경에 처하자, 태국 한인 사회는 한인회를 중심으로 발 빠르게 구호 활동에 나섰다.
김장열 회장이 선봉에 섰다. 쓰나미가 발생한 며칠 후인 2005년 1월 1일 새벽 첫 비행기를 타고 푸켓으로 날아가 희생자들의 장례식과 영결식으로 한인회장 첫 임기를 시작했다. 당시 한인들은 수백 구가 넘는 희생자들의 시신을 넘나들며 구호품을 전달하고 봉사활동에 나섰다.
김장열 회장은 "쓰나미는 태국인들에게 한국은 따뜻한 이웃이며 태국 사회의 일원이라는 모습을 보여준 때였다고 생각한다. 당시 모금 활동을 시작해서 삼성, LG, 현대 등을 비롯한 각 기업체에서 6억 원에 상당하는 물품과 구호기금을 마련했고 다방면으로 지원 활동을 했다. 우리 한인 사회에서도 현금 100만 밧을 모아서 그 당시 수상이었던 탁신 총리에게 한인회 간부들과 함께 전달했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의 쓰나미 구호 활동에 감복한 당시 푸미폰 국왕은 태국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김장열 한인회장에게 디렉쿠나푼 훈장(1등급)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는 한인회장 임기 동안 한인회를 쇄신하기 시작했다. ‘경로당' 수준의 이미지에서, 실질적 교민 지원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교민들의 믿음을 얻기 위해, 그는 직접 당시로선 큰 돈인 200만 바트(당시 약 7000만 원)를 한인회 발전기금으로 내놨다.
"한인회장은 감동을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민들은 절대 회비를 내지 않는다. 한국국제학교에도 재정적 도움을 줬다. 교민 사회가 감동을 받는 한인회를 만들어야 했다.”
그가 이끄는 동안, 태국한인회는 변화를 경험했다. 또한, 김장열 회장은 한인회 사무실을 한인 문화회관으로 개축하기도 했다.
![김장열 회장이 한인회장으로 있던 2005년, 태국 쓰나미 구호기금을 모아 한인회 임원들과 함께 탁신 총리에게 전달하는 모습이 당시 현지 신문에 보도됐다. [제공=김장열 회장]](https://cdn.dongponews.net/news/photo/202506/53025_205294_4940.jpg)

"한인회는 경로당이 아닌 기업형 전략 조직으로 변해야 한다”
김장열 회장은 단순히 ‘좋은 일 한 회장'이 아니었다. 그는 체계 개편자였다. 한인회를 단순 친목 조직이 아닌, 제도 기반의 공동체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한인회장직을 내려놓은 뒤에도 ‘원로'로 안주하지 않았다.
"한인자문회의를 새롭게 활성화했다. 역대 한인회장들과 단체장들이 모인 조직이고, 내가 지금 의장이다.”
자문회의는 차기 회장 후보를 심사하고, 운영의 방향을 논의하는 ‘견제 장치'이기도 하다. "이제는 정리가 다 됐다. 젊은 회장이 열심히 하고 있다. 나는 적극 지원한다. 하지만 한인회장이 정상적으로 운영하지 않으면, 언제든 브레이크를 걸 것이다.”
그는 "나이만 많다고 원로는 아니다. 존경받을 행동과 역할을 해야 진짜 원로로 대접받는다”고 말했다.
"한인 민주주의 진정한 가치와 정체성 깨닫게 하기 위해 자유총연맹 맡았다"
최근에는 자유총연맹 태국지회장을 맡게 되었다. 무려 20년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조직이었다.
"유명무실했다. 자유총연맹에서 지원이 나오지 않아 지금 거의 내 사비로 운영하고 있다.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자유총연맹 지부 회장에 선출된 그는 한인들의 민주주의 정체성 확립에 힘을 쏟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민주평통 태국지회장(2007~2011년)을 역임하며 교민 사회의 화합과 발전에도 기여했다. 특히 태국 태권도협회장(IOC 위원) 감사장 수상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태권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태국에 올림픽 2개 금메달을 안겨준 최영석 감독을 후원하는 등 태국 내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힘썼다. 그 스스로도 태권도인이다.
김 회장은 태국 한인 사회의 방향성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교민 기업들을 돕는 한인회가 되어야 한다. 교민 수는 코로나 이후 줄었지만, 기업 규모가 늘고 있다. 관광객도 다시 많아지고 있고.”
그는 현재 태국에 있는 약 1만 8000여 명의 교민 사회를 바라보며, "내가 처음 올 땐 3만 5000명이 넘었다”라며 아쉬움을 내비친다.
"하지만 다시 늘고 있다. 태국에 LG, 삼성 같은 기업의 아시아 본부가 있다. 관광업, 물류, 무역도 다시 활기를 찾을 것이다.”
그는 "기업 규모도 늘고 IT 분야 등 업종도 다양해지고 변화가 있지만, 그 변화가 아직은 느린 편”이라고 덧붙였다.
"한인회장 자리는 목에 힘주는 그런 자리가 아니다. 감동을 주는 자리여야 한다”
김장열 회장은 오늘도 묵묵히 조력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태국 사회는 역사적으로도 일본의 진출이 두드러지고, 지금도 외국인에 대한 텃세도 만만치 않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한국 교민과 기업들이 살아남는 길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한인회는 감동을 주는 조직이어야 한다. 그래야 교민들이 한인회를 신뢰하고, 힘을 보탠다. 그것이 공동체의 본질이다.”
그의 고향은 대구. 그러나 지금 그의 심장은 태국 땅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미래에는 다시 한국인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방콕 거리가 있다.
아시아한인회·한상총연 2025 정기총회가 열린 수도 프놈펜 행사장 라운지에서 기자가 마주한 김장열 회장은 누구보다 태국을 사랑했고, 누구보다 한국 교민들을 위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태국 한인회의 오늘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당시 탁신 총리와 함께 찍은 컬러 사진들이 담긴 휴대폰 속 태국 신문 이미지를 보여주며, 이 사진들이 태국에 사는 우리 한국인들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순간 그의 표정에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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