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한인사회 기초를 닦은 사람들③] 캄보디아 프놈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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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5-06-19 09:57본문
한인 조직범죄로 ‘코리안 데스크’ 운용 시급

(프놈펜=월드코리안신문) 이종환 기자
프놈펜 국제공항에서 시내를 잇는 메인도로를 타고 10여분을 달리면 부영타운에 닿는다. 대형 부영몰이 이미 자리잡고 있고 인근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선다. 한국의 부영그룹(회장 이중근)이 투자한 프로젝트다. 몰에는 한국식당을 비롯해 가게들이 입주해있다.
최근 프놈펜의 한인타운으로 빠르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지역이다. 2019년에 개교한 프놈펜 한국국제학교도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초중교 80명의 한인 학생들이 다니는 한국 교육부 정식인가 학교다.
지난 6월 프놈펜에서 아시아총연 총회와 한상대회가 열릴 때, 아시아 각국에서 온 한인회장들과 한상들도 이 타운을 자주 찾았다. 마침 대회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은 정명규 캄보디아한인회장의 친동생이 한식당을 열고 있어서였다. ‘정가네’라는 이 식당은 ‘찜닭’과 삼겹살 등 다양한 한식 메뉴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틀 사이에 무려 대여섯 번 이곳에 왔어요. 프놈펜에 오시는 회장님들을 안내하다 보니…”
식당에서 만난 박재용 싱가포르한인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먼저 온 적이 있다 보니 자청해서 안내역을 맡았다는 얘기였다. 부영몰은 아시아총연 대회 행사장에서 승용차로 불과 5, 6분 거리에 있어서, ‘툭툭이’로 불리는 세발 그랩택시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캄보디아 프놈펜에 한인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2006년 전후라는 게 현지 한인들의 얘기다.
캄보디아한인회가 만든 2016년에 편찬한 <캄보디아 한인 20년사>에 따르면,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당시 노로둠 시하누크 국왕이 인도적 차원에서 우리나라에 쌀과 구호자금을 보내왔다.
하지만 양국이 정식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1962년이었다. 그해 7월에 한국 총영사관이 문을 열었다. 초대 총영사로는 이택근이 부임했다. 당시만 해도 캄보디아 경제가 우리보다 나았을 때였다. 1962년 캄보디아의 1인당 연간 국민소득은 107불이었고, 한국은 96불이었다.

하지만 양국의 외교사는 캄보디아 현대 정치사의 굴곡에 따라 부침을 거듭한다. 단교와 재수교가 거듭된다. 공산정권 수립과 내전으로 수교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첫 단교는 1967년에 이뤄진다. 캄보디아는 1965년 북한과 외교 관계를 맺는다. 이어 이듬해 인공기를 달고 출전한 재일동포 출신 김귀하 선수가 한국으로 망명하려 한 사건을 둘러싸고, 캄보디아가 북한 편을 들어 북송하면서 한국이 단교를 선언했다.
그러나 3년 후 시아누크 국왕이 미국이 지원한 우익쿠데타로 물러나면서 1970년 양국은 재수교한다. 이때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는다. 이택근 대사가 초대대사를 맡았다. 1973년 외교부 자료에 따르면, 당시 ‘코리아하우스’라는 한식당 하나가 문을 열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지원한 논롤 정부도 오래가지 못했다. 공산 크메르루즈군이 진격해왔기 때문이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대사관을 철수했다. 폴포트가 이끄는 공산게릴라군은 1975년 4월 프놈펜에 입성했다. 이와 함께 ‘킬링필드’의 시대가 열렸다. 동족 200만 명을 살육한 광기의 시대였다.
한국이 캄보디아와 다시 수교한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였다. 훈센 총리가 권력을 잡고 내전을 거친 뒤인 1997년이었다.

수교를 앞두고 한인들이 먼저 움직였다. 크메르루즈군이 외곽으로 물러나고 프놈펜 지역이 비교적 안정되자 한인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던 것이다. 이들은 불굴의 개척자들이었다. 재수교 전인 1994년, 무역을 하거나 NGO, 선교 목적으로 프놈펜에 들어가 있는 한인수는 약 40명으로 알려져 있다.
1995년에는 호주시민권자인 장성민 사장이 한국식당 한국관을 열었고, 이어 동방식당과 소나무식당, 아리랑식당도 간판을 내걸었다.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첫 금메달을 딴 최용석 태권도 사범도 1996년 코이카에서 파견됐다. 당시는 비교적 치안이 좋은 벙껭공 지역에 한인들이 몰려 살았다.
재수교 1년 전인 1996년에는 한인회도 결성됐다. 프놈펜 한인교회의 서병도 목사와 교민사업가 손병덕, 김정욱, 노용준, 김문백 씨 등이 주축이 돼 한인회를 발족시켰다. 1997년에는 한인 최초 식료품점인 ‘한국식품’도 독립기념탑 부근에 문을 열었다.
이들 한인들은 우리나라와 캄보디아가 재수교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양국은 1997년 10월, 단교 22년 만에 재수교를 했다. 초대대사로는 박경태 대사가 부임했다.

한인회는 2, 3대 회장에 미국 시민권자인 김용덕 회장이 맡았다. 그는 1998년 한인회 산하에 한글학교를 개관해 이사장을 맡았다. 태권도 4단인 그는 태권도 보급에도 힘썼고, 훈센 총리와도 친분이 깊었다고 한다.
2004년에는 봉제 관련 회사를 경영하던 백남혁 씨가 4대 한인회장에 선출됐고, 2006년에는 섬유봉제회사를 운영하던 황순정 씨가 경선을 거쳐 5대 한인회장에 당선됐다. 황 회장은 제1회 교민체육대회를 성공리에 개최했다.
한국 기업 진출의 물꼬가 터지기 시작한 것은 2006년 3월 훈센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하고, 이어 그해 11월 노무현 대통령이 답방하면서였다. 훈센 총리는 노 대통령을 극진히 대접했다. 노 대통령은 앙코르와트도 방문했다. 노 대통령의 방문에 맞춰 경상북도 김관용 지사가 앙코르-경주 문화엑스포를 앙코르 유적지 부근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앞서 앙코르와트 유적이 국내에서 유명해지면서, 아시아나가 2005년 인천-시엠립, 2006년 인턴-프놈펜 구간을 취항했다. 대한항공도 곧바로 운항에 가세했다.
항공사가 취항하고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캄보디아 교민사회도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인회의 교민사회의 구심점이었다. 한인회 6, 7대 회장에는 김문백, 8대 박광복, 9대 회장으로는 양성모 회장이 봉사했다.

캄보디아한인회는 올해 6월 11일부터 14일까지 3박 4일간 프놈펜에서 아시아총연 총회와 한상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이와 함께 과거 모습에서 탈피해 탄탄한 기획과 진행으로 대회 모습을 확 바꿨다는 평가도 받았다. 전 양성모 한인회장과 현임 정명규 회장이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아 치른 대회였다. 한인회 부회장들과 임원들, 새로 설립된 캄보디아 한상연합회도 행사 진행에 큰 힘을 보탰다.

캄보디아 한인사회는 하지만 여전히 큰 난제를 안고 있다.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한인 범죄단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아시아총연 대회에 참여한 이재강 더불어민주당 재외동포위원장은 교민사회의 건의를 받아, “강력범죄를 해결할 코리안 데스크 설치를 적극 돕겠다”고 대회 개회식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코리안 데스크는 강력범죄 해결을 위해 한국 경찰을 캄보디아 경찰청에 상주시키는 것으로, 양국이 합의해야 해결이 가능한 사안이다. 캄보디아 한인사회는 현안인 이 문제 해결을 목표로 간담회를 개최하고, 우리 정부에 요청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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