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피나투보 화산재 위에 세워진, ‘필리핀 앙헬레스 코리아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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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회 작성일 26-03-24 20:09본문
[현장] 피나투보 화산재 위에 세워진, ‘필리핀 앙헬레스 코리아타운’
화산 폭발과 미군 철수 이후 폐허에서 시작된 한인사회 형성사
약 4km 이어진 코리아타운…수백 개 업소가 만든 한인 경제 공동체
교민지원센터·무료 법률상담…중부루손 한인회가 구축한 생활 안전망
“투표권 없는 교민사회”…현지 사회와의 연대로 지켜낸 권익
- 황복희 기자
- 입력 2026.03.23 10:37
- 수정 2026.03.24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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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앙헬레스 코리아타운을 지키는 한인회관 내 CCTV 모니터 앞에 선 최종필 중부루손 한인회장. [황복희 기자] 지난 3월 20일 늦은 오후, 필리핀 중부루손 앙헬레스시(市) 발리바고(Balibago) 일대. 더위와 습도가 올라가는 비수기 초입이라 그런지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다. 코리아타운으로 불리는 약 4km 구간을 따라 한인상가들이 그야말로 촘촘히 늘어서 있었다. 도로를 따라 한식당과 카페, 노래방, 마사지숍, 골프 관련 업소들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간판은 한국어와 영어, 타갈로그어가 뒤섞여 있었다.
차를 타고 천천히 이동해도 제법 걸릴 만한 거리 전체가 하나의 ‘한인 경제벨트’를 이루고 있었다. 그 중심부에 자리한 중부루손 한인회 건물로 들어섰다. 1층 복도를 지나 사무실 문을 열자 수 십여개 화면이 동시에 돌아가는 방범용 CCTV 모니터가 맨먼저 눈에 들어왔다. 코리아타운 구석구석을 비춰주기에 범죄 예방에 큰 효과가 있다고 안내하던 최종필 한인회장(62, 20·21대)은 말했다.
이곳은 현지 한인사회를 떠받치는 ‘실질적인 컨트롤타워’였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최종필 중부루손 한인회장이다.
약 4km가 다 한인 상권
“이 코리아타운이 한 4km 정도 이어집니다. 이 안에 거의 모든 한인 상권이 모여 있다고 보면 됩니다.”
현재 이 일대에는 호텔만 100여 곳에 달하고, 풀빌라가 약 400채 규모로 형성돼 있다. 여기에 식당과 유흥시설까지 합치면 족히 1000개 가량이 밀집해 있다.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숙박·외식·레저·유흥이 결합된 복합 상권이다.
“예전에는 여기 아무것도 없던 데예요.”
그 안에는 30년의 시간이 담겨 있다. 1991년 피나투보 화산 폭발과 이로 인한 클락 미군 공군기지 철수 이후 이 지역은 한때 폐허에 가까운 상태로 전락했다. 황폐해진 이 지역에 소규모 자본으로 들어온 한국인들이 식당을 열고, 하나둘 자리를 잡으면서 지금의 코리아타운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클락 직항 노선이 열리면서 새로운 반전이 일어났다. 한국에서 관광객과 투자자들이 몰려들었고 그 결과, 팬데믹 이전에는 이 지역에만 3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체류할 정도로 커졌다.
“이제는 현지인이 시장을 움직여”
코리아타운을 걷다 보면 낯선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삼겹살집 테이블마다 현지인들이 앉아있고, 카페에는 필리핀 젊은 층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손님의 80~90%가 현지인입니다.”
과거 한국인 관광객 중심이던 상권은 완전히 바뀌었다. 삼겹살과 치킨, 김밥은 기본이고 순댓국까지 현지인들이 즐긴다고 최 회장은 전했다. 처음에는 김치도 못 먹던 사람들이 이제는 ‘한식 마니아’가 됐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김치가 맵다고 안 먹었어요. 지금은 건강식이라고 찾아 먹습니다.”
카페 문화 역시 급격히 확산됐다. 한때는 커피숍 자체가 거의 없던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대형 베이커리 카페가 지역의 중심 공간이 됐다.
“예전에는 이곳 사람들이 미팅을 햄버거집에서 했어요. 지금은 다 카페에서 합니다.”
코리아타운은 더 이상 ‘한국인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현지인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필리핀 앙헬레스 코리아타운 중심에 위치한 중부루손 한인회관 앞에서 최종필 회장이 포즈를 취했다. “성공 확률 50% 이하…그게 현실”
하지만 화려한 상권 뒤에는 치열한 생존의 시간이 있었다.
“처음 들어온 사람들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성공 확률이 10~20% 수준이었어요.”
언어도, 법도, 시장도 모른 채 시작한 사업은 오래 버티기 어려웠다. 그 과정에서 투자 사기와 분쟁도 끊이지 않았다. 돈과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갈등이 커졌고, 일부는 강력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최 회장은 한편으로 선을 그었다.
“일반 교민이 위험한 게 아닙니다. 대부분 돈 문제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한인회가 생존 인프라”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한인회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확대됐다. 중부루손 한인회는 단순한 친목 단체가 아니다. 교민 생활지원센터를 운영하며 비자, 행정 처리, 운전면허 등 각종 문제를 직접 지원한다. 민간 에이전시에 맡기다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다. 또한 매주 현지 변호사를 통해 무료 법률 상담을 제공하며, 교민들이 분쟁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인회 운영을 위한 재정 역시 자체적으로 마련하고 있다. 연 1회 개최되는 한·필 문화 축제와 교민 골프대회 등 행사에서 모금과 후원이 이뤄지고, 교민지원센터를 통한 일부 수익사업이 재원으로 활용된다고 최 회장은 설명했다. 한인회 건물도 자체 소유다.
벽면의 CCTV 화면에는 코리아타운 전역이 실시간으로 잡히고 있었다. 이 시스템은 한인회가 자체적으로 구축하고 운영하는 것이다. 현재 수십 대의 CCTV가 설치돼 있으며, 추가 설치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네트워크’라고 최 회장은 강조했다.
“우리는 직접 단속할 권한이 없어요. 대신 경찰과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한인회는 현지 경찰과 긴밀한 협력 체계를 구축해, 사건 발생 시 즉각 대응한다. 교통사고가 나면 현장에 출동해 통역과 중재를 맡고, 분쟁 해결을 돕는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공항 문제에서도 효과를 보였다. 과거 한국인만 집중적으로 수하물 검사를 받던 관행이 있었지만, 한인회가 정치권과 협력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개선됐다.
“외국인은 투표권이 없기 때문에 정치·행정 권력과 더 적극적으로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최 회장은 강조했다.
짧은 어학연수로 끝날 줄 알았던 선택, 필리핀 30년
개인사로 화제를 돌렸다. 최 회장이 필리핀과 연을 맺은 것은 지극히 평범했다. 한국에서 무역업무를 담당하며 수출 바이어 상담을 하던 중, 언어의 한계를 느끼고 1992년 부족한 영어를 배우기 위해 마닐라에 왔다.
막상 와보니 당시 하루 14시간 넘게 정전이 이어졌고,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도 제대로 쓸 수 없는 환경에서 촛불을 켜고 공부해야 했다. 빨리 언어를 익히겠다는 생각에서 그는 한국인 하숙집 대신, 현지 영어 과외교사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 선택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그 집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족처럼 지내게 됐어요.”
그가 머물던 가정은 필리핀 엘리트 집안이었다. 대학 교수와 고위 인사들이 포함된 가족이었고, 그는 그들 사이에서 사실상 ‘가족 구성원’처럼 받아들여졌다. 낯선 타국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그 관계가 그를 붙잡았다.
“처음에는 이런 데서 못 살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다시 오게 되고, 또 오게 되더라고요.”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그는 필리핀을 오가며 사업을 시작했고, 결국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초창기 중고차 수출과 택시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실패를 겪고, 2005년부터 한국어 교육 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해 지금까지 2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한국 취업을 준비하는 필리핀 인력을 교육하며 기반을 다졌다.
그에게 필리핀에서 사업을 고려하는 사람들이 유념해야할 조언을 요청했다.
“눈으로 보고 ‘될 것 같다’고 하면 실패합니다. 전문성이 있어야 합니다.”
식당을 하더라도 메뉴에 대한 전문성이 필요하고, 호텔을 하더라도 운영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현지 언어를 이해해야 하고, 법과 문화를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 사람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인건비가 싸다는 이유만 보고 들어오면 안되며 노동 생산성과 관리가 더 중요하다”고 최 회장은 말했다.
수백 개의 업소와 수만 명의 사람들,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한인회와 네트워크가 맞물려 돌아가는 ‘하나의 공동체’.
해가 지자, 필리핀 앙헬레스 코리아타운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한인 밀집도 면에서 해외 '최고 수준'인 필리핀 앙헬레스 코리아타운에 걸린 한글 간판과 안내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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